十二闌干對遠岑 열두 난간이 먼 산을 대했는데, 올라가 보니 登臨倦容散幽襟 고단한 손이 그윽한 흉금을 터놓을 만하다榴花竹葉有佳色 석류 꽃과 대잎은 아름다운 빛이고紫鷰黃鸝俱好音 검은 제비 누른 꾀꼬리는 모두가 좋은 소리로다憑檻欲招丹蓑侶 난간에 기대어서 단전(丹篆)의 짝을 부르
지난 2006년 광주천 정화사업을 벌이면서 옛 정자 중 하나인 석서정을 복원했다.석서정은 1800년경에 편찬된 광주읍지에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정조 연간 이전에 사라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석서정 터는 신증동국여지승람(1481) 광산현 고적조에 현 남쪽 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정자가 많던
편방사(片坊祠) 유허비(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최초의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편방사(片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곳은 정지 장군이 말년에 낙향했던 곳이 광주목 편방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렬공
민고혁창사적비(民庫革刱事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쪽 1리의 거리에 있는 비석으로 졸은(拙隱) 박현(朴絢)의 기문(記文)이 있다.기문(記文)졸은(拙隱) 박현(朴絢) 지음우리 고을에 별다른 민막(民瘼)의 폐단이 없다는 일은 온 나라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일 뿐 아니라 이 고을의 사람들
광주시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율원군(栗元君) 이종(李宗) 사당(祠堂)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30리의 거리인 완동(莞洞)에 있는 비석이다. 그의 후손인 긍의(兢儀) 기섭(起攝) 강호(康五) 등이 서로의 힘을 모아 설치(移建)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옛날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830년이 유명조선국숭정대부판결사의정부예의찬성김공함신도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判決事議政府禮義贊成金公瑊神道碑)는 金致洙 쓰다.<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인 배재(梨峙)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후손 면식(冕植)이 이를 세웠다. *瑊은 올돌 감, 또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 충장사 내1842년김덕령 은륜비각이 있고 그 안에 비석이 있다. 원래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백비로 있었으나 나중에 목사 조철영이 이 사실을 알고 글을 새겨 충장사로 옮겼다.은륜비(恩綸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에 있는 빗돌로 명나라 영력(永曆)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신라왕자단비(新羅王子壇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50리의 거리인 평장동(平章洞)에 있는 건물로 광산김씨시조(光山金氏始祖)의 제향(祭享)을 모시는 김씨문중(金氏門中)의 단소(壇所)이다.기문(記文)후손 참판(參判) 김철현(金喆鉉) 지음우리의 시조(始祖) 이신 신라왕자(新羅王
광주시 남구 도촌동 산 181606~1679이 취병조공강생구지비(翠屛趙公降生舊址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서북쪽 30리 천곡(泉谷)에 있다. 조형(趙珩)공의 6세손 운한(雲漢)이 본주(本州) 목사로 부임하여 비석을 세웠다. 찬자는 운한(雲漢)이다.기문에 따르면 7세조 승지공(承旨公)이 병오(丙午)년 봄에
광주시 북구 충효샘길 7(충효동)1789년충장공 김덕령 충효리비(忠孝里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30리에 있다. 광주 석저면(石底面)의 고비(古碑名)로 朝鮮國 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충효동 정려비忠孝洞旌閭碑는 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그의 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04번지1739년신라왕자유허비(新羅王子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평장동(平章洞)에 있다. 김진상(金鎭商)의 음기(陰記)에 "광주의 서북쪽에 불대산(佛臺山)을 등지고 서석산(瑞石山)을 바라본 곳에 이른바 평장동(平章洞)이 있는데, 즉 옛날의 서일동(西一洞)으로서 나의 시조 신라왕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1957년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대로변에 있다.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큰길가에 세워 놓은 유적비이다. 장렬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6년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